새벽이다. 정리해 두었던 글과 명언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 생각은 더 또렷해지는 것 같다.
일관성에 대하여
“나쁜 의도는 고집, 좋은 의도는 일관성이라고 하니 방망이 깎던 노인에게는 고집이라는 단어가 잘못된 것이겠다.”
우리는 종종 일관성과 고집을 혼동한다. 방망이를 평생 깎아온 노인의 손길에는 변함없는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저 ‘고집’으로 보일 뿐이다.
“일관성은 상상력이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
이 말도 가끔씩 되새겨본다. 변화를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한 길만 고수하는 것을 일관성이라 포장하는 이들을 위한 경고일지 모른다. 평소에 고집하는 일관성에 대한 성찰은 늘 필요하다.
일관성도 늘 새로워야 유지가 되는 것 같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이나 끝없는 파도처럼. 늘 움직이지만 하나의 모습인, 그런 일관성의 느낌이랄까.
이야기로 이루어진 우주
“천억 준대도 백석 詩 한줄만 못해”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천억보다 나은 시 한 줄을 쓰려면, 삶에 일관성이 있어야 가능할까? 아니면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와야 가능할까?
우주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하나의 글에도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말이 담겨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과 한글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라이선스를 주장하지 않듯, 지브리 스튜디오의 라이선스 논란 중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인터넷상에 올리고 있다.
부끄러움과 당당함 사이
나는 늘 부끄럽다.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늘 부끄럽다. 부끄러움을 써내려 가다 보면, 자연스레 쓰레기통으로 가고. 부끄러워 버릴 때도 갈가리 찢다 보면, 쌓이는 건 또 부끄러움뿐이니.
어찌 보면 당당하다고 하는 내 삶은 오히려 수많은 악인들로 인한 만들어진 삶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의 경험과 진실
오래전 일이지만, 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비전공자 학생이 잘난 체하길래 조언했더니, 그 학생은 결국 다른 이들을 선동하고 나를 모함해 해고까지 이르게 했다. 십 수년 쌓아온 커리어를 나눠주고 함께 성장하려 했던 진심은 무시된 채 말이다.
그 후 그 학생은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타이틀만 쌓아가고 있다. 서울대 학석박 출신 형이 말했던 것처럼, “박사는 공부를 한 번 마쳐보는 것이 의미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타이틀만 좇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타이틀보다 중요한 것
프로그래머로써 한 마디 적어 보자면, 지난 이력은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 지금 어떤 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접근하는지가 중요하다.
어차피 이력 따위야 아무도 관심 없을 테니 말이다. 신라면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의 이력은? 핵심은 라면을 얼마나 맛있게 만들 수 있는지, 포장은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유통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이다.
학교는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벌을 내세우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너네 연봉은 높은데 당연히 내가 거기 군림해야 하는 이력을 가졌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진실의 힘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진실을 말하고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이 변화의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윤오영부터 오스카 와일드, 피터 드러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현인들의 말이 이 글에 녹아있다. 이 글에 내 것인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실을 기반으로 하려는 내 생각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내 모습을 유지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네트워킹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지만 늘 새롭기도 하다. 다른 것보다 아는 사람이 많으니 다양한 정보를 듣고, 또 그런 정보를 조합해서 내가 예상한 가설이 인용될 때 쾌감을 느낀다.
끝맺음
“노랑과 주황이 없는 파랑은 없다.” – 빈센트 반 고흐
가슴속에 박힌 이 말을 이해하려고 오늘도 노력해 본다. 나는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저 멀리 뭔가 섬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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