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마그누센: 거악의 그림자

밤을 새워 초안을 쓰고, 두 차례 퇴고를 거쳤다. 약속은 지켰다. 이제 이 글을 쓴다. 다리가 아픈 몸을 이끌고 저녁에는 가족과 외식을 할 생각이다. 나를 이 글쓰기로 몰아넣은 건 관계의 스트레스일까, 해야 한다는 강박일까, 아니면 과거의 빌런들에 대한 복수심일까?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

현대에도 마그누센은 존재한다. 셜록 홈스조차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거대한 악. 10년 전 이야기라 이제 유튜버들도 다루지 않지만, 이 거악은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감지조차 되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오래된 기사 하나를 끌어왔다. ‘이건희 동영상 유출 사건’. 결과는? 잡범만 잡혔다. 이건희는 건강 문제로 기소중지. 무전유죄, 유전무죄. 이 익숙한 공식은 여전히 굳건하다.

법은 왜 이리 느릴까? 인공지능이 법조문과 판례를 분석해 하루 만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시대다. 국민투표와 알고리즘을 결합하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할 텐데,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로 저항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1년, 2년, 3년 끌리는 소송이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건강 문제로 기소중지? 그건 자기 병원이 있어야 가능한 특권이다.

신문사는 기사를 지우기 어렵다. 역사서처럼 진실을 기록한다고 자부하니까. 하지만 이건희 기사는 쓰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다. 옹호하려던 의도가 훗날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무대응이 최고의 방어다. 대응 조직 자체를 없애는 게 가장 확실하다. 기업은 이 점을 곱씹어야 한다.

거악은 시대를 초월한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이가 많듯, 푸틴을 떠받드는 이도 있다. 푸틴 정권과 연관된 폴로늄 독살 사건을 보자. 차(茶)를 매개로 한 독살, 러시아 정부의 개입은 “제한적”이라지만, 정적 제거의 의도는 선명하다. 이런 거악을 비판하는 글은 세상에 울릴까? 경제가 어렵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사회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민족투사의 후손은 비루하고, 내부고발자는 외면당하며, 옳은 말을 하는 이는 고립된다. 작은 사회나 큰 사회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정의를 외치며 민주당을, 이재명을, 노무현을 떠드는 이들. 그들의 말은 공허하다. 명예를 좇는 척하며 돈을 쌓는 졸부들을 나는 수없이 보았다. 최고 부자가 되겠다는 건, 어쩌면 거악이 되겠다는 선언일지 모른다.

이 글은 가상의 인물을 빌려 썼다. 윤석렬은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거악을 잡으려면 내가 거악이 되어야 할까? 셜록 홈스가 마그누센을 처리한 방식처럼? 그 답은 독자에게 맡긴다. 다만, 전세 사기로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자살은 사기꾼을 더 날뛰게 할 뿐이다. 복수를 택하라는 게 아니다. 삶을 택하라. 천국이 있든 없든, 삶은 그 자체로 싸울 가치가 있다.

코멘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