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악과 나, 그 경계 위에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밤새 브런치북 초안을 쓰고 퇴고를 두 번 거쳤다.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이 글은 그 약속의 연장선이다.

잠시 후엔 아픈 다리를 이끌고 가족과 외식을 할 예정이다. 오랜만의 평온이 되길 바라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꺼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

스트레스일까, 강박일까, 아니면 과거에 만났던 빌런들에 대한 복수심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뒤엉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시대에도 마그누센은 존재한다.
셜록 홈즈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그 ‘거악’처럼, 우리 사회에는 너무 거대해 손댈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뉴스엔 나오지 않고, 유튜브도 외면하며, 조용히 우리 삶에 스며든다. 너무 커서 감지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 시스템의 정점에 서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거악이 되어야 하는가?

역사는 내부 고발자와 소수의 외침에 인색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곁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침묵을 택하고, 시스템에 순응하며, 자리를 얻는다.

나도 그들을 봐왔다. 졸부가 되고, 정당성을 말하며, 타인의 죽음을 연민이 아닌 숫자로 기록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최고 부자가 되고 싶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거악이 되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법은 여전히 무전유죄, 유전무죄.
이건희의 동영상 유출 사건 이후 ‘잡범’만 잡혔고, 그는 ‘건강상 이유’로 기소중지되었다.

판결을 내릴 수 있는 AI가 이미 존재하는데, 그 도입은 느리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몇 년씩 걸리는 재판 속에 누군가는 삶을 잃고, 누군가는 여유롭게 병실에서 정치를 한다.

그러니 나는 궁금하다.
윤석열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의 말로가 궁금한 건, 그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 시스템이 특별해서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만약 내가 셜록 홈즈였다면, 마그누센을 어떻게 했을까?
누군가 우리 가족을 건드렸다면? 전세 사기 피해자가 자살을 택한 그 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그저 자살을 말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악을 제거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윤리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나는 말하고 싶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복수하라.
살아서 싸우라.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라.
천국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을 만드는 건 언제나 사람이라는 건 분명하다.


💬 마무리:

이 글은 나의 기록이다.
지금은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는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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