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코드보다 어려운 것
15년 넘게 개발을 해왔습니다. 삼성전자에서 KNOX SE를 개발하며 A1급 세계 특허의 대표 발명자가 되기도 했고, 여러 회사에서 CTO로 일하며 기술을 이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커리어에서 가장 큰 실패들은 기술적 판단 착오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사람과 관련된 것이었죠.
오늘은 CTO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여러분께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1. 세상을 안다는 착각
배신과 번개탄
몇 년 전, 친한 지인에게 크게 배신당한 적이 있습니다. 번개탄을 한 박스 샀습니다. 비싸지 않더군요. 그릇도 함께 샀습니다.
3년 뒤 그걸 버릴 때, 바닥에 떨어진 검댕이를 닦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안다고 생각했구나.”
경찰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자살할 때 뭘 준비해야 하냐고. 친구는 진지하게 답해줬습니다. 영수증과 유서를 함께 놔두라고. 조사 때문에 필요하다고.
상담을 받으며 배웠습니다. “정상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생각을 실천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저는 세상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요.
2. CTO가 겸손을 배우지 못하는 이유
기술 리더십의 함정
개발자로 성장하고, 리드가 되고, CTO가 되는 과정은 ‘주도성’의 연속입니다.
- 아키텍처를 결정하고
- 기술 스택을 선택하고
- 방향을 제시하고
- 팀을 이끕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태도가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진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결과가 나왔기에 겸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독단은 독이다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며 내린 결정들을 돌아봤습니다. 실제로 손해 본 금액을 계산해보니 약 10억 정도였습니다.
- 검증 없이 믿었던 파트너
- 경고 신호를 무시한 채 밀어붙인 프로젝트
- “내가 더 잘 안다”며 무시한 팀원의 의견
- 오만함으로 놓친 기회들
모두 기술적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3. 겸손은 커뮤니케이션의 베이스다
겸손을 배우고 나서
겸손을 배우기 시작하며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
-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맞아”
- “내 경험상 이게 최선이야”
- “나는 이미 해봤어”
이후:
-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세요?”
-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요?”
- “다른 관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놀랍게도 팀원들이 변했습니다. 더 많이 말하기 시작했고,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겸손은 약함이 아니다
많은 리더들이 오해합니다. 겸손을 약함으로 착각하죠.
하지만 겸손은:
- 모른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
-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강함
- 배울 수 있다는 가능성
-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
특히 AI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기술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에, “내가 안다”는 태도는 곧 뒤처짐을 의미합니다.
4. 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것
여러분과 함께 일하며 배웁니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다 끊으며 그 심각성을 알지만, 누군가는 한 번도 안 펴보고도 압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10억을 잃어가며 배우는 사람이 있고, 저처럼 아직도 배우는 중인 사람이 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겸손한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팀의 문화입니다.
제가 바라는 팀 문화
-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팀
- “이거 왜 이렇게 하나요?”가 자연스러운 팀
- 주니어의 질문이 시니어의 맹점을 발견하는 팀
-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팀
-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가 존중받는 팀
- 실수를 숨기지 않고 공유하는 팀
- 배우려는 자세가 당연한 팀
- CTO도, 주니어도 모두 배우는 사람인 팀
- 직급이 아니라 인사이트가 중요한 팀
-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팀
- 서로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는 팀
- 성장을 함께 축하하는 팀
5. 겸손의 실천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상적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실천 가능한 것들을 제안합니다.
CTO인 저부터:
- 코드 리뷰에서 “왜 이렇게 했나요?”보다 “이렇게 한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어요?”
- 회의에서 결정 전에 “제가 놓친 게 있을까요?” 물어보기
- 틀렸을 때 즉시 인정하고 수정하기
- 팀원의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
팀원 여러분께:
- 의견 차이를 두려워하지 말기
-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편하게 말하기
- 모르는 걸 솔직하게 인정하고 함께 찾기
- 동료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하기
에필로그: 배울게 참 많다
아이들과 놀아줄 때면 모든 심각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제 생각들이 별 가치 없다는 걸 느낍니다. 그냥 꿈만 꾸며 살아도 행복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CTO라는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특허가 몇 개인지,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얼마나 성장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아직도 겸손을 배우는 중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배워가고 싶습니다.
블록체인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만, 겸손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겸손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가장 큰 자산을 가진 팀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 Joe, CTO
P.S. 이 글이 불편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다른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게 바로 제가 바라는 팀 문화입니다.
배울게 참 많습니다. 함께 배워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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